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미술 (문단 편집) === 근대 === 19세기 청나라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었다. 바깥으로는 신장 지역에서 연일 계속되는 소요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있었고 바다에서는 유럽 열강들이 전면적인 통상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찌감치 서구 문명의 영향력 아래 놓은 일본은 기존의 조공책봉질서를 붕괴시키며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내부적으로는 건륭제 시기부터 시작된 황실 재정의 고갈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고 그것은 가경제 시기 백련교의 난의 진압 과정에서 관군의 지지부진한 진압 속도로 드러났다. 거대한 변화의 시기 속에서 청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예술 분야에서 이러한 변화는 크게 서양 문화의 영향과 일본 문화의 영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명청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미술과 서양의 미술은 이미 중국 예술계가 경험한 바가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19세기의 정치, 경제적인 격변과 맞물려 두 미술의 경향은 보다 전면적으로 중국 미술계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전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인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비단 중국 뿐만이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를 맞이했던 동아시아의 미술가들 앞에 놓였던 공통적인 선택지기도 했다. 여기서 전통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건륭제 시기부터 청대 미술의 주류로 발돋움한 양주화파의 미술을 의미했다. 양주화파가 중국 화단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이 경향은 여러모로 개성적이고 따라서 개혁적인 성향이 있었지만 19세기를 넘어오며 양주화파는 이전의 양식들이 그러하였듯 전통화파를 대표하는 미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양주화파를 계승한 19세기의 화파는 해상화파 혹은 해파로 알려졌다. 이들은 강남 지방과 그보다 더 아래지역인 광동 광서 지방에서 활약했던 일군의 미술가들이었으며 상업미술가들이었다. 해상화파의 화가들은 채색과 수채화풍의 그림을 선호하였으며 주제에 있어서는 화훼도와 같은 소품을 즐겨 그렸다. 이들은 개업식 선물로 작품을 주문제작하는 상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를 축적했다. 해상화파는 그 세부적인 경향에 있어서 또 두 개의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 유지의 측면에서 좀 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금석파의 화가들로 조지겸, 오창석 등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경향은 이 보다는 더 자유로운 화풍이며 대중적인 성향의 화조화를 중심으로 화업을 이루었던 임웅, 임훈, 임예, 임백년의 양식이 있다. 이들 네 명의 임씨 화가들은 흔히 4임(四任)으로 줄여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이 모두 같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의 관계로 사숙했던 화가들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해상화파의 화가들과 달리 영남화파로 대표되는 일군의 화가들은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자신들만의 양식을 창조해 나갔다. 영남화파 화가들은 주로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강성해 졌을 때 일본으로 대거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다. 본디 중국 내에서 일본 미술의 영향력은 매우 약소한 편이었는데 이는 중국 특유의 중화 의식의 발로였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이후에는 반일 감정의 격화로 인해 일본으로의 유학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을 때에도 영남화파는 자신들의 화풍이 일본 화풍의 영향과 독립된 양식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 그림들의 면면은 당시 활동하던 일본 미술 작가, 대표적으로 다케우치 세이고나 야마모토 슌코의 작품을 많이 참조한 흔적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던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화풍과의 연계성을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일본 화풍에서 자주보이는 독수리, 갈대, 단풍과 같은 상징들을 중국적인 해석으로 변용시켰다. 이들 영남화파는 당시의 평판이 어찌되었던 이후 화조화 분야에 있어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는 초기 1세대 영남화파인 고검보나 고기봉 같은 화가들부터 오늘날에서 생종해 있는 여웅재나 조소앙 같은 2세대, 3세대 영남화파들이 이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영향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서양의 영향 또한 전면적으로 들어왔다. 이미 청대에 궁정화풍에서 서양의 기법이 보이고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촉했던 광주 지역 같은 경우에는 임관과 같은 사람들이 광주에서 그림을 그렸던 영국인 조지 치너리의 제자로 들어간 적이 있지만 이 시기 서양의 영향은 비단 화풍이 중국 내에 들어오는 것을 넘어 중국인들이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그들의 화풍을 배우는 단계까지 넘어갔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향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미술 분야 1호 국비유학생이자 귀국 이후에는 공산화 이전까지 중국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서비홍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서비홍은 독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배웠던 채원배의 추천으로 8년간 파리, 베를린 등지에서 유학했는데 이 시기 그린 화풍을 보면 당대 아카데미즘의 경향이 짙게 배였다. 하지만 서비홍의 경우 한국의 고희동과 마찬가지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통적인 화풍으로 선회하게 된다. 사실 동아시아에서 최초 혹은 1세대에 해당하는 서양화가들 중 상당수가 이후 전통적인 화법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일단 당대 동아시아에서 서양화라는 것이 익숙치 않아 대중들에게 잘 소비되지 않았고 서양화를 배우는데 있어서도 돈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서비홍은 자신의 화풍에 있어서는 서양화법을 포기하였지만 미술 제도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미술 교육 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중국에 돌아온 직후 중앙미술학원 원장을 맡고 이후에는 북경미술대 학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술 교육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 때 설치된 중앙미술학원과 북경미술대에서 배출된 서비용의 제자들은 중국의 화단의 곳곳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해 그의 영향력이 사후에도 얼마간 지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1호 국비 유학생인 서비홍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 프랑스로 유학갔던 유해속이나 임풍면 같은 화가들도 1세대 서양화가로서 자신들의 화풍을 중국에 알리고 근대 미술 교육 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들 1세대 서양화가들은 당시의 시대적인 경향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화풍을 배웠는데 서비홍과 같은 아카데미즘에서부터 유해속이 배워온 추상표현주의, 임풍면이 구사했던 야수파 표현주의와 같은 다양한 화풍이 중국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들 1세대 서양화가들은 전술했듯 이후 전통화로 회귀하는 급격한 화풍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생애 전반에 걸처셔 전통적인 서양화를 고수했던 작가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경향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미로 유학한 최초의 화가였던 이철부가 바로 이러한 사례로 지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885년 영국 에링턴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뉴욕으로 옮겨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 갔던 여타 다른 화가들이 돈이나 문화차이로 인해 오랫 동안 유럽에서 체류하지 못한데 반해 그는 꽤 오랫동안 구미권에서 체류했으며 50년이 흐른 1930년 귀국한다. 그는 유럽의 제도권 미술이 고수했던 환영적인 유화 작품을 고수했고 그 경향을 중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1세대 서양화가들과 차이점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풍장백도 서양화를 고집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여명을 맞이한 중국 미술은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불안한 공존 속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간 화가들이 다양한 화풍을 선보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중국 근대 미술은 이후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으로 현대 미술과의 접점을 찾기가 힘든 측면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많은 현대작가들이 근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오마주]]하고 그들이 천착했던 주제를 재발견하는 것을 보면 이 둘의 연관성이 결코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미술사]][[분류:중화민국의 문화]][[분류:대만의 문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